<푸른눈의 천사> "응....... " 유리로 된 돔형태의 된 거대한 도시는 밤낮으로 산소가 뿜어져 나오고 있 었다. 소리는 기괴하다. 쉭쉭,하고 뭔가가 숨쉬는 듯한 소리가 온 집안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시트를 움켜쥔 손 위로 땀이 가득 찬 커다랗고 두꺼운 손이 닿는다. 일부러 펴보일 듯이 손가락 사이를 억지로 파고들어 와서 붙잡았다. 손가락 사이를 어루만지는 느낌은 굉장히 간지럽다. 눌러 참듯이 필사적으로 쥐고있던 손을 마음대로 할수없게 되자, 참을수 없는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곧 뜨거운 손가락이 얼굴을 붙잡고 입술이 입안을 파고 들었다. 어지러워질만큼 입술을 빨리는 것도, 목구멍 안쪽까지 거침없이 휘감기는 혓바닥도 아무리해도 기분 나쁘고 아프기만 하다. 집어 넣어져있던 커다란 성기가 배 안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정신이 나가버릴만큼 고통스럽다. 괴로운 자세를 하고 있는데 숨까지 제대로 쉴수 없으니까 나중에는 의식 이 희미해져서 매끄럽게 젖은 살이 부딪히는 소리만 또렷하게 귀에 들려 오는 것이다. 자연에서 저절로 생성되는 산소량이 극악으로 나빠지면서 눈 질병 과 뇌에 치명적인 암 발생률이 높아지자 정부는 도시전체에 거대한 돔을 씌워 일정한 량의 산소를 내보내는 계획을 실시했다. 내가 사는 도시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돔 형태의 국가가 생 겨나기 시작했다. 공기중의 산소가 줄어들자 자연히 물속에 녹아있는 DO(용존 산소) 의 양도 줄어들어 바다나 호수는 더러운 부유물들과 악취로 가득했 다. 그러니까 현재 돔 바깥의 산소량은 기껏해야 대기중 10%내외. 원래의 기준치보다 11%나 모자란다. 땅은 이미 황량한 잿빛 모래로 뒤덮였고 지금은 정상적인 인간이 살수 없는 곳이 되었다. 유리 돔 너머로 쳐다보는 하늘은 몹시 흐리고 구름 모양이 기괴하 게 일그러져 보였다. 거실에 서면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음새 없이 길게 이어진 창으로, 예리한 커터 날을 세워놓은것처럼 길죽하게 뻗어있는 건물들이 보 인다. 건물들은 모두 다 이어져 있었다. 보기에는 각각의 서로 다른 건물처럼 보이지만 건물 사이 사이마다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지하는 완전히 뻥 뚫려있다. 모조리 연결되어있는 건물 내부 때문에 외관은 단순해 보여도, 기압 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는 리프트로 도시의 이쪽 끝에서 저 쪽 끝 까지 출입제한 지역을 제외한 모든곳을 이동할수가 있는 것이다. 내부가 복잡하게 연결되어있는 대신 건물 바깥은 사람들의 그림자 도 보이지 않아 소음 하나 없는 도시는 마치 유령들이 모여 사는 곳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거리의 외관같은건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건물은 늘 천편일률적인 연한 청색 유리로 빛났다. 그래도 내가 살고있는 건물은 도시안에서도 가장 최상의 고급 맨션 으로, 외관은 하얀 원형으로 되어있고 흘러나오는 산소량도 충분하 다. 투명한 유백색의 벽으로 둘러쌓여진 실내는 넓고 쾌적하며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는 딱 적당한 온도가 늘 유지되었다. 유리막으로 둘러쌓여져 있기 때문에 바람이 없는 대기는 늘 조금씩 높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회사가 아닌 일반 가정에까지 온도 장치를 대주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밤낮으로 쾌적하게 지 낼 수 있다는건 행운이었다. 이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돔 바깥은 나가본적도 없을뿐더러 집을 나서서 돌아다녀본 기억조 차도 드물었다. 가지고 있는 지식이래봤자 모두 다 컴퓨터로부터 얻거나 집으로 놀 러오는 사촌한테서 들은것들 뿐이었다. 이곳에서 달아나면 얼마나 오래 살수있는걸까, 머리를 감싸쥔채 아무리 곰곰이 따져봐도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 다. 신분증이 필요한 도시내에서는 살수가 없을테니 결국 돔 밖으로 나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곳에도 인간들은 있으니까,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극악한 방법으로, 어쨌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풍족한 산소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버린 폐는? 그게 끝이다. 뇌와 폐는 금방 세포이상으로 암이 생길것이고 결국 얼마못가 병들 어 죽게될 것이다. 언젠가 한번 달아나려다가 실패했을 때 무건은 나한테 마구 화를 내는 대신 차가운 눈으로 돔 바깥의 생활이 얼마나 끔찍한지 차근 차근 말해주었다. 화내는것보다 그 편이 훨씬 더 공포스럽다는걸 무건도 알고있는 것 이다. 하지만 끝이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당장 필요한건 '결심, 뿐이었다. "얼굴도 쳐다보지 않을건가? " 목소리는 좋다. 표정하나 없는 얼굴에 비하면 독특한 음낮이가 있는 굵고 나지막한 음성은 훨씬 인간적이다. 상위계급의 표식인 흰 제복차림으로 무건은 둥근 반타원형의 현관 출입구 앞에 서서 창가에 서있는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보같은 얼굴로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고 있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 리자, 무건은 굳이 인사를 바랜건 아니었던 듯이 별다른 말없이 잠 시 내 얼굴을 응시하고는 그대로 스윽 출입구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현관에 자동 잠금 시스템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무건은 안에서는 현관 출입구의 잠금 시스템을 해제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그건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동안 복잡한 건물내부를 머릿속으로 그려넣으며 무건의 성격으로 한번 실패하게 되면 뒤는 없다는 각오로 도망쳤던 계획이 하루도 안되어서 끝장난 뒤부터 문은 특별한 조작이 없이는 안에서 절대 열릴 수 없도록 다시 설계되었다. 나가고 싶으면 무건에게 직접 연락해서 이곳 시스템을 해제시키도 록 해야했다. 정말이지 인공지능을 머릿속에 심어놓은 기계처럼 요만큼의 빈틈도 없는 인간이다. 밤 사이에 몸에 묻은 무건의 흔적을 털어내기 위해서 샤워를 하고 습관처럼 욕실의 거울을 통해 뚫어지게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두 개의 눈동자를, 눈동자의 색깔이 언제나와 같은 검은색이라는걸 한참동안 확인한 뒤에야 가느다랗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침대에서 매일 바보같은 계획이나 세우고 있는 무건은 인정하려고 들지 않지만, <알>은 누구나 쉽게 낳을수 있는게 아닌 것이다. 언제쯤 그 사실을 알아줄까 한숨을 내쉬지만 사실은 정말로 내가 임신같은 것을 해버려서 무건의 알을 낳게 될까봐 밤낮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건의 알을 낳다니,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알을 원하면 얼마든지 자신의 알을 낳아주는 곳이 있다. 섹스를 하든 정액 샘플만을 넘겨주든 완벽하게 자신의 유전자를 가 진 아이를 타인의 몸에다 배양시킬 수 있었다. '출산'을 담당하던 여성이 어느때 부터인가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면서, 이미 십 수년전부터 대부분의 인간은 남자의 몸에 서 흐물흐물한 젤리 상태의 '알'로 태어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이오테크놀로지가 발달하면서 일정한 나이대가 되면 인 간의 몸은 저절로 노화에 관계된 모든 생체활동이 중지되고 있었다. 인간의 몸이 조금씩 형태를 바꾸어 <진화>하게 되면서, 이상한 돌 연변이식의 변화도 생겼다. 그러니까, 알을 낳는 남자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여성이 출산을 담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 지금은 어쨌든 알을 낳아주는 센터의 남자들이 반드시 필요했지만 그러니까, 일반 남자 들이 아이를 가지는 것은 절대 금기시 되었다. 언제든지 원하면 아이를 낳아주는 정부 기관에 소속된 남자들-그러 니까 센터의 사람들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일반 남자들이 아이를 낳게 되면 직위가 어떻든간에 의무적으로 알을 낳아주는 남자들과 동급으로 취급되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나라에서 보호는 받고 있었지만 일반 사람들의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태아를 낳는 모체가 사라지게 되자 정부는 도시안의 직업을 구하지 못한 인간중에서 모체가 될 수있는 남성을 골라 인간들을 번식시킬 수 있도록 했다. 남성의 몸에서도 생명은 자라난다. 물론 조건은 수반되고 있었다. 남성 호르몬중에 하나인 아드레노스테론이 많으면 몸속에 난막卵膜 이 생기지 않는데 그래서인지 태아 배양을 직업으로 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양성兩性인간처럼 보였다. 도시내에서 작은 체구를 갖고 있으면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가족단위는 주로 성인 남자와 배양받은 그들의 아이로 이루어 지고 있었는데, (아이를 갖고싶지 않으면 그냥 혼자 살수도 있다) 열 다 섯살이 지나는 아이는 무조건 직업을 구해야 하는게 규칙이었다. 아이가 일정기간이 지나도록 직업을 구하지 못하면 아버지의 신분 이 어떠하든지 돔 바깥으로 쫓겨나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체구가 작은 남자는 살기위해 어쩔수없이 아이를 낳아주는 일을 하게 되는일이 많았다. 아기는 흐물흐물한 점액질의 형태로 열달이 지나면 몸속에서 저절 로 흘러나온다. 일단 임신을 하게 되면 몸속은 고유형질을 띈 유전자가 미묘하게 변하게 되면서, 난막이 생기고 배아가 착상 되는것과 거의 동시에 눈동자 색깔이 검은색에서 푸르스름한 색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 상태로 알을 낳아 버리면 눈동자는 두 번다시 원래의 색으로 되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몸속에 태아를 배양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남자들을 쳐다보 는 사람들의 시선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일단 눈동자 색이 푸른빛을 띄게 되면 인간적인 대우따위는 포기해 야한다. 푸른 눈은, 남자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표식이었다. 우수한 인간임을 상징하는 검은눈의 사람들 사이에서 연약한 푸른 빛의 눈동자는 도시내에서 최하위 계급을 뜻했다. 정부에서 보장해주는 지위는 그럴듯하지만 남자들이 바라보는 시선 은 단지 경멸스러운 것이었다. 그건 돔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일단 푸른눈을 하게 되면 도시 안에서도, 돔 바깥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몸이 되었다. "아주 태평하시구만. " 잠결에도 또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사촌인 일우였다. 덩치는 무건만큼이나 커다랗지만 기분나쁠만치 애교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다. 게다가 귀가 따가울만큼 야단스러운 말투로 떠들어서 한번 다녀가 면 귓속이 울릴 정도였다. 오늘 새벽까지 저런 큰 덩치를 가진 남자에게 시달린 탓에 얼굴보 기도 귀찮아져서 눈을 감은채 고개를 돌리자 심술부리듯이 곧장 커 다란 상체로 내가 누워있는 시트 위를 내리덮듯이 하면서 눌러댄다. "나류, 언제까지 드러누워 있을 참이야!" 스물 여덟이나 되어서 정말 어린애같은 남자다- 인공 태아가 생겨나면서 혈연으로 이어진 친척에 대한 개념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지금은 형제 라던가 사촌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상 당히 드문것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무건도 사촌인 일우가 제멋대로 집을 드나드는 것에 대 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뚝뚝하고 인정머리없는 남자가 싫어하기는커녕 마음대로 출입할수 있도록 허가증도 내준 모양이었다. 숨도 못쉬게 괴롭히는데다 더 버티면 평소의 버릇대로 함부로 입술 을 부벼대면서 키스해 올것같아 할수없이 기진맥진한 기분으로 일 어나 앉았다. 그러자 녀석은 방금전까지 어린애처럼 못되게 굴었던 주제에 침대 가에 느긋하게 앉아서 태평스런 표정으로 내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 확인해 보자 시계는 정오를 조금 지나고 있었다. 아침에 무건이 나간후 샤워후에 바로 드러누워서 자버렸다. "넌 어째 매번 똑같은 질문이냐?" 자다 깬 직후라 머리가 무거워서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자 바로 코 앞에서 일우가 뭐가 우스운건지 장난스럽게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일우는 정보국에서 일하고 있는 듯, 무건과 일 에 관해서 나누는 대화중 대부분은 도시 안의 비밀스런 일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돔 바깥의 상황에 대한 얘기들도 있었다. 그럴때는 귀를 바짝 세우고 듣지만 매번 전부다 끔찍한 얘기들 뿐 이어서 산소량이 좀 더 늘었다던가,하는 얘기같은건 들을수 없었다. 자연 산소량이 늘어나면 돔 바깥으로 달아나서 살수가 있다. 도시 안과 밖의 경계는 산소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일뿐, 도시 바깥에 자연적인 산소량이 증가하게 된다면 그 구분도 사라져 서, 지금처럼 암세포를 달고있는 도시 바깥의 인간들이 폐쇄된 도시 안으로 들어올 것을 염려해 유리돔 주변을 까다롭게 경계하지도 않 을 것이다. 그러면 이곳에서 도망치기가 훨씬 쉬워지는 것이다. "나류. 거기 보인다. "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봤자 사람 얼굴 구경해 보는 것도 힘들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자 제대로 된 옷차림을 하는것도 무의미해져서 대충 끈으로 묶으면 되는 욕의만 걸친다던가 하는일이 많아졌다. 게다가 지금은 끈도 풀어져 버려서 상당히 이상한 차림이 되어버렸 다. 흐트러져서 허리선이 환히 드러나 보이는 욕의를 힐끗 내려다본뒤 무거운 손으로 옷에 달린 조그만 허리끈을 잡아맸다. 그제서야 흐릿하던 머릿속이 조금 개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저 녀석 역시도 제대로 된 옷차림과는 거리가 있는 것 이다. 제복을 입는 날보다 청바지와 와이셔츠 차림인 날이 더 많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일우는 고전적인 이상한 옷차림을 상당히 좋 아해서, 지금도 청바지와 푸른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근무시간 아닌가요? " 이런 제멋대로인 녀석, 나같으면 당장에 잘라버릴텐데. "모처럼 일이 평온할때란 말야. 어떻게 지내나 시간내서 보러 왔더 니 여전히 쌀쌀맞구나~ 넌! "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우는 소리를 낸다. 정말 다 자란 어린애다. 저런 녀석한테 소중한 산소를 나눠주다니 정부에서는 좀 제대로 된 인재를 골라내란 말이다,하고 외쳐주고 싶 어졌다. "무건은 요즘 어때?" "왜 저한테 그런걸 묻는거죠? 그 사람은 당신이랑 훨씬 더 많이 떠 들어 대고 있는데. " "흠, 그건 혹시 질투냐? " "어디에 누가 말입니까-" "나류 넌 점점 무서워지는구나, 난 이제 지는 나이라구. 조금 있으 면 적정나이에 들어간단 말야. 만수백세따위 원하지도 않는데 인간 의 몸은 정말 잔인해. " 적정기에 들어가면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게 된다. 신체도 얼굴도 그대로, 하지만 수명은 있다. 200살이 가까워지면 조 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 그대로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서른살이 가까워지면 자연스럽게 적정기에 들어가 버리게 되므로 실제 느끼는 나이는 30살이 끝일지도 모른다. 그뒤는 어쩔수없이 나이에 대해서 무감각해 지니까. 일우와 나는 사촌지간이라고 해도 나이차는 10살 이상이나 났다. 그렇지만 내가 아무렇게나 대해도 이 사람은 늘 웃는 얼굴인 것이 다. 그것이 기묘하게 마음 편해서 사실은 이렇게 찾아와 주는게 위안이 될 때도 있다. "미인만 찾아대면서 지는 나이라는둥 만수백세따위 어쩌고 하는건 쬐금 이상한걸요." 조금 기가 찬 어조로 대꾸하자 일우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제멋대로 인 태도로 앉은 자리에서 내 무릎위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하지만 확실히 체력이 예전에 비해서 많이 딸린다구. 무건 같은 괴 물 놈이랑은 달라. 신체조건이 딸린다는건 정말 괴로운 일이야. 이 런 약해빠진 몸으로 적정기라니, 미인이 오래 달라붙어 있을리 없다 구." 심각하게 듣고 있다가 단숨에 기운이 빠져서 멍청하게, 시트밑의 내 다리를 베개삼아 누워있는 녀석을 내려다보자 일우는 얼간이 같은 말을 내던져 놓은것도 모자라 내 얼굴을 보면서 문득 윙크까지 해 보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바보같은 얼굴이었다면 정말 봐줄만 했을텐데 아쉽게도 얼굴은 꽤 잘생겼다. "그래봤자 금방 질리서 남자를 사흘걸러 바꾸는건 당신이니까 원한 사지 않도록 하라구요. 애인한테 총같은걸 맞고 좀비가 되어서 나타 나면 여기에 발 디디지도 못하게 할거니까. " 피부조직에 치명적인 종양이 생기지 않는한 익사했다던가 총에 맞 았다던가 높은곳에서 추락했다던가 칼에 찔렸다던가 전기쇼크를 입 었다던가 하는따위로 사람이 죽는일은 없었다. 심장이 완전히 멈췄어도 간단한 방법으로 되살릴수가 있었다. 하지만 일단 세포 조직에 암이 발생하게 되면 그때는 치명적이 되 었다. 필요한 장기를 떼어낼 목적으로 길러진 클론이 주인을 살해하는 일 이 빈번해 지면서 클론에 관한 것들은 벌써 오래전에 금지품목으로 모두 폐기처분 되었지만 굳이 몸을 대체할 클론을 기르지 않아도 장기에 암이 발생하게 되면 도리없이 죽는수밖엔 없었다. 항생제의 발달로 면역이 되풀이 되면서 암세포가 인체에 치명적으 로 변화해 일단 발병하게 되면 순식간에 온몸으로 종양이 번져 목 숨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병든 세포는 제일 먼저 뇌수쪽으로 이동하고 빠르게 근육과 혈액에 까지 침투해 몸안의 장기를 모두 대체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게 되 는 것이다. 어쨌든 병에 걸리지 않는 한, 한번 죽은 몸을 다시 되살리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 대신 살아난 사람은 뇌만 살아 움직이는 좀비같은 것이 되어서 모습이 상당히 부자연스러워지게 되었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사촌. " 덩치만 커다란 바보는 감격한 얼굴로 내 말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 버리고 난뒤에, 갑자기 드러누워 잘 것처럼 시트속으로 파고 들어와 좀전까지 내가 누워있던 곳을 배게째 차지하고 엎드렸다. "조금만 잘게. 무리해서 왔더니 졸려. " 정보국에서 바로 온게 아니었나? 그렇게 피곤하면 무건도 없는데 굳이 낮에 찾아오지 않아도 될걸. 아무튼 진짜 이상한 녀석이다. "그러니까 나류, 하나밖에 모르는 녀석은 별로 없으니까 좀 잘 대해 줘. 불쌍하단 말야, 그 녀석. " 잠꼬대처럼 눈을 감고 말하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더더욱 알수가 없었다.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 "'연합국 지도자'라는 놈이 맨날 죽상만 하고 있으니까 외교가 안 된단 말이야. 그 얼굴이 먹히는건 녀석한테 반해있는 얼빠진 수상들 뿐이니까. " "그런건 나한테 말해봐도 아무 소용없어요. " 실제로 그 따위건 나한테 말해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안그래도 형제나 친척단위로 된 가족관계는 극히 보기드문데 친동 생을 상대로 알을 낳게 하려는 계획이나 가지고 있는 남자라니, 틀 림없이 제 정신은 아닌 것이다. 극악무도하다. 그런 남자를 불쌍하다느니 하다니, 무슨 생각인걸까?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벌써 일우는 잠에 곯아 떨어진 듯이 작게 코고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건은 바깥에는 한 발자국도 못나가게 하는 주제에 이것저것 배우 게 하는건 많아서 나는 컴퓨터실에 오후내내 쳐박혀 있었는데 저녁 즈음에 침실로 가봐도 한번 잠에 곯아떨어진 일우는 태평하게 코까 지 골면서, 일어날 기미조차도 안보였다. "당신, 간밤에 클럽에서 남자들이랑 실컷 놀았던거죠? " 겨우 정신을 차린 남자한테 기가 찬 어조로 말하자 일우는 부정하 지 않고 늘어지게 하품을 해댔다. 섹스의 개념이 출산에서 그저 즐기는 것뿐,으로 바뀌게 되면서 연애 는 터부에서 벗어나 상당히 자유로워졌다. 남자끼리의 연애는 당연한 것처럼 되어서, 일우처럼 한번에 여러명 의 애인을 두는 녀석들도 많았다. 도시안에서 미인이라고 칭해지는 사람들은 모두가 키가 크고, 적당 히 체구가 있고 얼굴이 조금 날카롭게 생겼다. 일우의 애인들도 하나같이 그런 녀석들이었다. 변태스런 취미까지 가지고 있는건지 그는 가끔씩 사귀고 있는 애인 의 영상을 포켓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조그만 재생기로 나한테 보여 주곤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누가 누군지 모를만큼 죄다 비슷하게 생겨보였다. 이제껏 그렇게 해서 본 일우의 애인만해도 숫자가 엄청났다. 어쨌든 그런 사람들이 넘쳐나는 도시에, 무건은 확실히 좀 이상하 다. 밖에서 일할때의 모습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정신이 좀 나간 것처럼 보였다. 일우의 말처럼 무건은 오로지 하나밖에 모른다. 자신의 알을 낳는 것, 그러니까 그 상대가 왜 나여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는 것 이다. 굳이 태아 배양을 직업으로 하고있지 않은 남자라도, 연합국 최고 지도자의 알이라면 누구든지 기쁘게 낳아줄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눈동자 색을 파랗게 물들여서라도 틀림없이 가치가 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다음대의 지도자로 키우는 일은 대단한 일이니 까, "뭐야? 벌써 여덟시가 넘었어? " 아무렇게나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칼을 나른하게 손끝으 로 쓸어올리면서 일우가 연신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하루종일 자리 비워놔도 괜찮아요? " 휴가중이라는 말이 없었으니 틀림없이 그대로 무단이탈한거다. 근무시간에 나와서 하루종일 무단이탈이라니 징계만으로 끝나면 다 행일테지, "무건은? " 아직 졸리운 표정으로 겨우 침대에 붙어있던 얼굴을 떼고 어두워진 창밖을 돌아보다가 일우가 문득 조금 불안한 얼굴로 물어왔다. "수행원들한테서 조금전에 연락이 왔는데 곧 온다고 했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올거니까, " "뭐라고!! " 언제까지고 파묻혀있을것처럼 이불속에서 꾸물대더니 엉덩이에 불 이라도 붙은것처럼 벌떡 일어난다. "아.. 나류, 무건한테 나 늦게까지 여기 있었다는 말은 하지마. 치, 침실에 있었다는 말도! 알았지? 다음에 또 보자...!! " 도무지 종잡을수가 없는 남자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둥대면서 침대를 빠져나온 일우는 재빨 리 현관앞으로 도망이라도 가는것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출입증을 찾을수가 없는건지 당황해서 붉어진 얼 굴로 셔츠와 바지 주머니를 뒤져대고 있었다. 문은 안에서 조작이 있어야지만 열렸다. 매사에 게으르고 태평하기만 한 남자가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 은 드문일이라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에 손도 대지 않은 문이 천천 히 열렸다. 안에서 연 것이 아니라 밖에서 열린 것이다. 타이밍을 딱 맞춰 밖에서 들어온 사람은 무건이었다. 무건은 정말 인간처럼 보이지 않을때가 많은데, 그건 얼굴에 표정이 전혀 없고 동작이 늘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기계 인간같은게 아닐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할때도 있지만 정부에서 그런 불완전한 인간을 지도 자로 만들었을 리가 없는것이다. 그래도 어쩔때는 몹시 단정하고 우아해 보이기도 한다. 제복을 벗고 욕의나 실내복을 걸친채 테이블 앞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서류를 들여다 보거나 차를 마시거나 할 때는 스물 여덟이나 된 주제에 어딘지 얼굴 표정이 기묘하게 풀어져서 어린애처럼 무방 비하게 보일때도 있다. 체구는 좋다. 191센티나 되는 키에 어깨선이 넓게 벌어져서 아주 건장해 보인다. 어두운 밤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은 짧게 커트 되어있고 생긴 모양따 위 인간미라고는 요만큼도 안보이지만 어쨌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항상 화내고 있는 얼굴조차도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다. 어쨌든 섹스할때만은 완전한 인간처럼 보이니까, 몸에 체액이 맺히고 사정도 한다. 표정도 어딘가 모르게 괴롭게 보이기도 하고, "넌 이 시간까지 여기서 뭐하는거냐? " 안그래도 인상이 무서운데 무건은 들어오다말고 눈썹을 찌푸리고는 출입구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굳은채로 서있는 일우를 노려보고 있 었다. 나한테도 없는 출입증까지 건네준 주제에 늦게까지 집에 있었다고 눈썹을 찌푸리다니, 둘다 똑같이 이상한 놈들이다. "아.. 지금 막 나가려고 했다구. " 언제 어느때라도 태평해질 수 있는 천성 탓인지 막상 무건의 얼굴 을 보게되자 조금전까지 긴장하던 기색은 순식간에 어딘가로 내다 버린 듯 한심한 표정이 되어서, 일우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어 보 였다. "그러니까... 쬐그만 소형선 하나로 일주일동안 800마일씩이나 떨어 져있는 도시들을 어지러울 정도로 돌아다니다가 겨우 오늘 날아왔 구만 너무하는거 아닙니까. 정보국 사람이라고 얼마나 경계를 하는 지 피곤해서 죽는줄 알았다구요. 앞으로 '지도자' 대신 임무를 맡길 거면 수행원이 딸린 제대로 된 비행선을 내주던지- 특별히 대리 증 서라도 만들어 주십쇼. " 무건과 일우는 나이가 같았다. 하지만 무슨 버릇같은건지 일 얘기를 할때는 일우쪽이(쬐금 이상한 말투긴 하지만 어쨌든) 존칭을 쓴다. 나 혼자만 있을때는 아무렇게나 이 자식, 저 자식,하고 무건을 욕하 는 주제에 일단 대면하게 되면 나름대로 그에게 지도자 대우를 해 주는듯하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800마일 거리의 다른 도시에 있다가 이곳으로 바로 날아왔던 건가? 그래서 낮에 눕자마자 잠들었던 거군. 무건은 엄살피우는 소리를 하는 일우를 어쩐지 피곤해 하는 얼굴로 노려보다가 곁에 서있던 내 얼굴을 흘긋 내려다 보았다. 나는 열 네 살이어서 키가 다 크려면 아직 몇 년이 더 남았다. 하지만 내 나이쯤 된 녀석들은 대부분은 이미 성인의 키를 가지고 있으니까, 완전히 다 자라려면 스무살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보통 열다섯살 정 도면 이미 다 자란 키가 되는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165센티 정도밖에 안되었다. 공평하지 못하게도 무건도 일우도 나보다 훨씬 더 크고 튼튼한 몸 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를 하려면 어쩔수 없이 고개를 위로 치켜올리고 있어야 했는데, 별로 얼굴 맞대고 얘기하고 싶지 않은 상대를 올려다 보면서까지 시선을 맞춰야 하는건 고역인 것이다. 그래서 대화를 할때 내 시선은 항상 내 발끝이었다. "식사는? " "안 먹었어요. " "아직? " "별로 배고프지 않으니까, " 이 사람은 묘한것에 집착을 한다.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과목 중에는 골치아픈 기계공학이나 현대 문명외에 인류의 지나온 과정을 세세하게 설명해주는 부분들도 있 었다. (사실은 이쪽이 훨씬 더 흥미롭긴 하지만) 그러니까 지구에 지각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현 재까지- 고생물학.생태학에 관한 부분이라던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 는 아주 오래전에 멸종된 동물과 식물이라던지, 과거에 나라가 어떤 식으로 도시 국가의 형태로 세분화 되었는지, 그리고 인간의 진화 과정은 어땠는지,같은걸 아주 세세하게 알수 있었다. 인간의 몸은 조금씩 진화를 거듭하는 사이 어느 사이엔가 에너지를 발생시키는데 필요한 매개체로 쓰이던 <먹는 행위>를 더 이상 필 요로 하지 않게끔 되었다. 입안으로 집어넣고 삼켜서 소화시킨후, 에너지로 다시 환원시키는 까다로운 절차같은걸 거치지 않아도 자생적으로 몸에서 생겨난 에 너지로 충분히 살아갈수있기 때문에 굳이 음식물을 섭취할 필요가 없어진거다. 위장으로 들어간 음식물은 그대로 흔적도 없이 위가 분해시켜 버린 다. 안먹는다고해도 몸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러니까 음식물을 요리해서 섭취하는 귀찮은 습관같은건 지금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미각이라는것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역시 매일의 습관 처럼 먹는것을 즐기는 인간들도 있었다. 무건도 그렇다. 밖에서는 모르겠지만 매일 집으로 돌아오면 식사를 하고 차도 마신 다. 몸에 묻은 더러운 먼지분자를 완벽하게 처리해주는 샤워실이 있음 에도 시간을 들여가며 따스한 물로 따로 샤워를 하기도 한다. 식사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무건은 출입구의 문을 열어 항상 밖에 서 대기하고 있는 검은 제복차림의 수행원들에게 식사준비를 하라 고 지시했다. 잘은 모르지만 저 사람은 식탁앞에 앉아 나이프와 포크를 휘두르는 걸 꽤나 즐기는 것 같다. "넌 안가고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 문득 생각난것처럼 무건이 일우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뭐? 지금 가라구? 야, 나도 배고파. " 얼빠진 얼굴로 배고프다고 우는 소릴 하는 사촌은 더 이상 신경쓰 고 싶지 않아졌는지 무건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곧장 샤워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니까 물이 나오는 샤워실 쪽, 지도자 주제에 틀림없이 눈으로 더러움이 씻겨나가는걸 봐야지만 샤워한 기분을 느끼는 결벽증 환자임이 틀림없다. "자식이 의리라곤 요만큼도 없다니깐." 무건이 사라지자 일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 얼굴표정을 바꾸고 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해젖혔다. 오늘은 부드러운 군청색 밤하늘의 홀로그램이다. 한번도 본적없는 지구의 풍경을 그리워하기라도 하는것처럼 무건은 요즘 유행한다는 갖가지 세련된 실내 내부를 펼쳐놓은 홀로그램대 신 오랜 옛날에 지구를 감싸고 있던 자연 풍경을 좋아했다. 3차원의 홀로그램을 작동시키면, 불어오는 바람이나 햇빛, 흙냄새나,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 손 끝에 닿는 촉각까지도 모조리 다 마치 현실처럼 느낄수가 있다. 밀빛의 풀이 자라난 넓은 초원에 서서 눈앞에 펼쳐져있는 아주 오 래전에 존재했을 그런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센치멘탈한 기분도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다가 돔 바깥으로 나가게 됐는지를 모르겠단 말야. 배양 센터에 있던 녀석이 그런곳을 서성대고 있을 까닭이 없는데 말이야. " 홀로그램이 작동되고 있는, 새하얀 레이스가 깔린 고전풍의 커다란 식탁에서의 식사는 요리도 의자의 쿠션도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한참을 자신이 일주일동안 정찰한 연방국에 대해서 떠들고 있던 일 우는 문득 생각난것처럼 돔 바깥의 일을 입에 담고 있었다. "이쪽 돔 안의 사람이던가? " 진지하게 듣고 있었던건지 무건이 일우쪽을 쳐다보면서 말한다. "응. 입고있는 센타의 제복이 틀림없는 이 쪽 도시의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발견된 곳도 바로 여기의 돔 근처였고. 다른 도시에서 온 녀 석은 아니었다구. 경비병한테 맡기고 그냥 보고만 받았으면 좋았을 걸 말야. 소형선으로 거의 도시근처까지 오다가 보고 받았으니까, 지나치는 길에 내렸던 거였어. " "근처에는? " "아무도- 벌써 사고를 냈던 인간들은 줄행랑을 치고난 뒤여서 근방 에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더군. 아마 밤새도록 차에 줄을 매달아 서 끌고다닌 모양이지. 온 몸이 찢겨져서 근처에 고인 피만도 가득 이었으니까. 이미 숨이 끊어져 있어서 의료센타로 옮기게 했지만... 그러니까 처음에 의복만으로는 인공배양 센터에 녀석이라는걸 몰랐 단 말이야. 왜냐하면 두 눈이 없었거든. 예리한 칼 끝으로 손상됐다 고 하는데 완전히 홍채에 동공이 안보였다구. 소생술을 하게 했지만 이미 전염병 같은것에 감염되었을 가능성도 커서,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하더라. 그 개 자식들, 근처를 이잡듯이 찾게 했는데도 안되더군. 그 놈들은 신분증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지. 그래서 좀더 넓은 지역으로 뒤져볼까해. 가까운 연방국 근처까지, 정찰부 녀석들이 뭐라고 잔소리를 해대건 내 눈으로 직접 본 이상 반드시 잡아 낼거니까," 드물게 분개하고있던 일우는 얘기하느라 잠시 내려놓고 있던 포크 를 다시 집어들고 고기 한점을 입안으로 거칠게 밀어넣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낮에 소형선으로 귀환하다가 마침 돔 근처에 있던 살해당한 시체를 하나 발견해낸 것 같다. 그런데 그 시체가 이 곳 도시의- 인공배양 센타의 남자였다는 거다. "그 인간들은 인공배양을 통해서 아이가 출산된다는걸 잊은건가? 눈동자 색 하나로 사람을 살해해도 좋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거지? 그 녀석들이 없으면 인간들의 번식은 끝장인데도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 "도시 바깥의 인간들은 환경 때문에 돔안의 자연출산보다 훨씬 더 알을 낳을 확률이 낮아. 길어봤자 200년 안에 인간의 수가 절반 이 상으로 줄어들거다. 그런데 돔 안의 인간들은 혜택을 받고 있지. 센 타의 녀석들이 끊임없이 알을 낳아주니까. 언제까지고 출산이 이어 질수 있단 말이야. 바깥에 떠도는 녀석들이 돔 안의 인간들을 얼마 나 증오하는지 알잖아. 도시 안의 인간들은 그저 배양센터의 녀석들 을 경멸할 뿐이지만 바깥의 녀석들은 도시 안에서 끊임없이 알을 낳아주는 녀석들을 항상 죽이고 싶어하는거다. " "뭐야? 그러니까 <종족싸움>이라도 하고싶어하는 건가? " 기가 막히다는 듯이 멍하니 입을 버리고 일우가 무건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런것 같다." "젠장.... " 얼굴을 찌푸린채 나직하게 욕을 내뱉으며 말하고 있는 일우-이 편 이 훨씬 인간적이다-와 대조적으로 무건은 아무런 감정표현없이 무 미건조한 얼굴로 대꾸하고 있었다. "그러면 도시 바깥에 살고있는 사람들한테 새로운 돔을 지어주면 되잖아요?" 내가 불쑥 꺼낸 말에 순간 무건은 물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동작 을 멈춘채 내 얼굴을 보면서 눈썹을 치켜올리고 있었다. 순간 조용하던 식탁위로 일우의 숨넘어갈것처럼 웃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웃느라 커다란 어깨를 떨면서 식탁위에다 한쪽 팔을 괸 일우는 어 쩐일인지 아주 유쾌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류! 그게 그렇게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아. 바깥의 녀석들도 숫자 가 엄청나단 말이야. 돔을 세우는데 들어가는 예산은 상상할수도 없 을 정도다. 게다가 돔안에 산소는 또 어떡하고. 누가 예산을 짜고 계속 뒤를 봐주냐. 설령 돔을 세우기로 결정 한다고 해도 연합국에 서 가만있지 않을텐데? 그쪽도 여기랑 사정이 같단 말야. 다른 도시 의 돔밖 인간들이 자기들에게도 혜택을 달라고 여기저기에다 폭동 이라도 일으키게 되는 날에는 끝장이야. 연합국끼리 전쟁이라도 나 길 바라는거냐? 응? " "그렇게 바깥에 사는 인간의 수가 많은가요? " 얼마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엄청나게 많은 숫자다. 병이 깨끗이 완치되고 전염병이 사라지게 되면 그때가서 한번 생각해 보지. " 어딘지 기묘한 얼굴로 냉정하게 말해놓고는 어느새 무건은 물끄러 미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씹는건 대뇌중추에 좋으니 먹어라." 무건은 무뚝뚝한 얼굴을 한 주제에 가끔씩 이상한 소리를 잘한다. 저런 얼굴로 뭔가를 권유받아봐도 명령이라는 기분밖에는 들지 않 지만 어쨌든 지시받은대로 나는 내려놓고 있던 포크를 다시 집어올 렸다. 고기는 아무래도 역한 냄새가 나서 싫었기 때문에 내 접시위에는 삶은 완두콩과 케러멜을 뿌린 크림 카스타드, 붉은색의 푸딩젤리같 은 것이 보기좋게 세팅되어 있었다. 완두콩과 젤리푸딩은 반 쯤 먹었고 카스타드는 내키지 않아서 손대 지 않았다. 그러니까-- 역시 파란눈을 하고 있으면 돔 바깥의 생활따위 죽을만 큼 힘든 것이다. 그럴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조금전 일우가 꺼낸 말은 확실히 쇼크였다. 생각해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무리다. 이미 머릿속은 동공이 빈채 피투성이가 된, 알을 낳은 남자의 돔 바 깥에서의 최후가 비참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우울해져서 포크를 손에 쥔채 멍하니 슬리퍼를 신은 발끝을 내려다 보고 있자 일우는 어쩐지 힐끗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내 생각을 읽 어낸것처럼 무건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어쨌든 이런 일이 자꾸 생기니까 <내 알을 낳고 싶다>는 생각따 위 요만큼도 안생긴단 말야. 게다가 어린애를 키우는건 짐이라구. 내 책임으로 짐 덩어리를 하나도 아니고 '모체'까지 둘 씩이나 감당 할 자신은 없으니까 말이지. " "일터에까지 애인을 끌어들이는 자각없는 놈이 책임운운하고 있는 거냐? " "윽!! 딱 세 번뿐이었다구! 제기랄, " 불시에 약점을 찔리자 일우는 곧장 큰소리로 항의했다가, 무건에게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이고 뭔가 움찔한듯이 금방 일곱번으로 정정했다. "그러니까- 그건 나도 어쩔수 없었단 말야. 제멋대로 찾아오는걸 나 더러 어쩌라구.... " 그리고 얘기는 금방 어느 놈한테 보고 받은거냐, 스파이라도 기르고 있는거냐,하는 시시한 걸로 넘어가 버렸다. 나름대로 편안한 여행이었는지 일우는 연합 정찰을 다녀온뒤 뒤늦 게 일이 밀렸다고 매일같이 메시지로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는 조만간 다시 오겠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일우한테서 온 메시지 연결을 끝내고 침실로 돌아가자, 무건은 언잖 은 표정으로 침대가에 우두커니 앉아서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 고 있었다. "밤늦도록 무슨 얘기들을 한건가? " "일우가 바쁘다고 울어요. " 아낌없이 부려먹는 나쁜놈의 지도자 새끼라고 한 말은 당연히 빼고 대충 대답하자 무건은 배부른 소리라고 코웃음치고 바로 누울것처 럼 시트를 들춰올렸다. "올라와. " 역시 할 생각인가? 파란눈을 하고 있는 배양센터의 남자가 돔 밖에서 잔인하게 살해당 했다는데-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 사람은 전혀 아 무렇지도 않은건가? 일우가 다녀간뒤로 요 며칠간 침대에 누우면 잠자코 품에 안고 자 기만해서 확실히 사촌인 일우가 한말을 신경쓰고 있는건가 했는데 이 사람은 단지 그동안 내키지 않았을 뿐이었던 듯, 무릎걸음으로 침대에 올라가 눕자 곧바로 실내등을 잠들 수 있을만큼 낮추고는 내 허리위로 올라탄다. 그리고는 내 욕의를 풀고 다리를 벌려놓는데 이미 딱딱하게 굳은 성기가 허벅지 안쪽으로 스쳤다. 어차피 상관없는 것이다. 절대로 임신은 되지 않을것이고, 기회를 봐서 이곳을 달아나면 그 뿐. 일우로부터는 끔찍한 얘기를 듣긴 했지만 대신 훨씬 좋은 정보를 얻었다. 돔 바깥에도 사람들이 잔뜩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알고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것보다 바깥 사정이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파란 눈을 하고 있지 않은 이상은, 그들도 나를 미워할 까닭이 없을 테니까, 적당히 어울려서 살아가면 되겠지. 어쩌다가 이런 지경이 되버린걸까, 모든건 다 무건 탓이다. 알을 낳는 직업은 아무런 상관 없었다. 어차피 나같은 몸으로는 도시안의 어디를 돌아다녀봐도 직업을 구 하기가 힘들 것이고, 알을 낳을수 있는 조건도 안되는 몸이라면 도 시 바깥으로 나가면 그 뿐이다. 무건의 알만 아니면 누구의 알이라도 낳아줄수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내 친 형인 것이다. 돌연변이같은 것이 수를 늘리면 곤란했기 때문에, 가능성이 높은 근 친교배는 이미 오래전부터 금기시 되어왔다. 게다가 나를 낳아줬던 어머니는 그런건 병균을 온몸에 매달고 있는 머리가 썩은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해줬었다. 지금이라도 무건이 생각을 바꾸고 나를 자유롭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이상한 인간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밑에서 후벼파져서 뱃속으로 이어지는 고통은 끔찍하다. 마치 끝없는 고문이라도 당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거기에 맞닿는 쾌락도 분명히 있다. 안에 커다란 성기를 품고 뒤흔들리는 괴로움외에 무심코 혀를 깨물 어 버릴 것 같은 달콤한 쾌감도 있는 것이다. "이제 얼마후면 열 다섯이 된다구요. " 내 등뒤에 바짝 달라붙어있던 무건의 커다란 손이, 발가벗고있는 배 로 흘러내려와 살며시 숙이고 있는 고간을 붙잡았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다리 사이로 무건의 것이 끈적한게 흘러내렸지 만 참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도시안에서 열다섯이 되도 아무런 제재가 없는 인간은 나밖에 없을거에요. " "지도자의 혈육이다. 당연한 거지. " 너무나 당당하게 말해젖힌다. 틀렸다. 지위를 막론하고, 직업을 구하지 못하면 쫓겨나는게 도시안의 법률 이 아니던가? "직업이라도 갖고 싶은게냐? 어떤 일을 하고 싶은거지? " 어쩐지 놀리는듯한 어조로 타액이 묻어서 끈적거리는 고간을 붙잡 고 난잡스럽게 잡아당겼다가 짜부러뜨리거나 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극을 줘도 당연히 내 성기는 보통 남자들의 것처럼 되지 않는다. <적정기>에 들어갈때까지 정액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몸은 정상적 인 인간분류에서 제외된다. 배양센터의 남자들은 정액을 만들지 못하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성적인 자극을 받아도 신체적인 변화는 전혀 없다. 대부분 몸집이 작은 남자의 경우에 해당되는 경우이긴 하지만 나 역시도 무정액의 환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열다섯인 지금까지도 전혀 '남자로서의 징후'가 없으니까. "일을 하고 싶다고? 나류, 넌 이곳에서 얌전히 내 알을 낳아주면 돼. 나한테 얄팍한 수는 안통하니까 엉뚱한 생각은 그만하는게 좋을 거다. " "그럼 알을 낳으면 나를 나가게 해줄건가요? " 성기를 지분거리던 손끝이 딱 멈췄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알을 낳아주면, 더 이상은 나한테 볼일이 없을테니 그때야말로 자유 로운 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차라리- 하지만 푸른 눈을 하고 어디로 가서 자유롭게 살수 있을까, 평생을 두꺼운 모포를 뒤집어 쓰고 얼굴을 숨긴채 빛이 조금도 들지 않는 어두운 동굴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것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곧장 무시무시한 힘으로 성기가 쥐어지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머릿속이 얼얼할 정도의 아픔에 몸이 잡아당겨져서 똑바로 뉘여지 는것도 모른채 잔뜩 움츠리고 있다가 겨우 눈을 뜨자, 바로 눈앞에 서 무건이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가게 해달라고? 여기서? 나한테서? 다시 한번만 말해봐. " 무표정한 얼굴로 내뱉는 말이 무서워져서 다시 눈을 질끈 감자, 곧 바로 입술위로 물어뜯길것처럼 고통스러운 키스가 이어졌다. 혀가 뽑히기라도 할것처럼 아픈 키스에 울고 싶어졌다. 항상 이렇다.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앞은 보이지 않고 매일같이 똑같은 현실만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단지 확실한 것은 더 이상은 이곳에 머무를수는 없다는 위기감뿐으 로 그런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고 초조해져서 견딜수가 없었 다. "뭐야? 요즘 즐기는건 혹시 SM플레이? 의료센타에 가봐야하는거 아냐? " 농담조로 내뱉고 심각한체하며 발가벗고 있는 내 몸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는 일우였다. 어째서 매번 침실에 서있는거냐, 이 남자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나른한 몸을 일으키자, 일우는 불량배 같이 삐딱하게 선 자세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언제 왔어요? " "조금전에. 한참 자고 있어서 거실에서 10분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 다." 씨익 웃으면서 그래도 10분이면 오래 참은거라고 한마디 덧붙인다. 한번도 깨지않고 늦잠을 자버렸다. 시간을 확인해 보자 벌써 오후 2시가 지나 있었다. "혼자 심심해서 죽는줄 알았어. 주인은 널브러져서 시체처럼 누워있 고. " "어제까지 바쁘다고 울었던 주제에. " "네가 곧이곧대로 무건한테 일러바치는 바람에 오늘 아침에 애 데 리고 헛소리 하지 말라고 주의 받았어. 제길. 상사한테 주의받으면 감점인데. 벌점 많아져서 나 월말 휴가 취소되면 보복으로 여기서 먹고 자고 해줄테니까. " 너스레 떨 듯이 말하면서 털썩 내 옆에 주저 앉는다. 잘못했다, 진짜 본인이 한 말을 곧이 곧대로 전해 줬으면 일자리에서 당장 짤 렸을지도 모르는데. "그렇잖아도 매번 이곳에 와서 시간 보내고 있잖아요. " "그거야... 그런데 나류, 먼저 옷부터 좀 챙겨입는게 어떻겠냐. 나야 올때마다 눈이 즐겁긴 하지만 그 응큼한 자식이 혹시 집안에다 카 메라라도 설치해놓고 어디에서 훔쳐보고 있는게 아닌가 최근에 좀 의심스러워지고 있단 말야. 요즘들어서 나를 아주 미워한다구. " 무심코 몸 아래를 내려다보자, 발가벗고있는 몸이 총천연색으로 난 리가 나 있었다. 게다가 아직도 성기가 지끈지끈 아팠다. 새벽에 무건이 물로 씻어줬기 때문에 몸에 끈적거리는건 조금도 남 아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 뭔가 더러움이 남아있는것같은 불쾌 감이 있었다. 침대위에 아무렇게나 걸쳐져있던 욕의를 잡아다가 입고있자 일우가 불쑥 말했다. "나류, 오늘부터 나흘간 무건은 출장이야. 내가 대신 가줘도 상관은 없지만 꽤 중요한 일이라서, 최근에 한번도 연방국을 방문하지 않아 서 그곳에 있는 수상들이 의아해 하고 있어. 명색이 지도자일뿐이지 정부와 연방국에 부려먹히는 심부름꾼이나 매 한가지니까 말이야. 가엾다구." 무건이 어디론가 다니러 갔다는 말따위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해주 지 않아도 나는 그다지 상관없는데 일우는 마치 변명하는것처럼 말 하고 있었다. "나흘간이면....... " 아앗..! 그렇다. 나흘간의 출장이면, 그러면 나흘동안 여기서 달아날 계획을 차근차 근히 실행해도 좋다는 뜻이 아닐까, 하지만 두근거리는 기대는 잠시뿐이었다. "그러니까- 한번 기회를 놓치면 그 다음은 힘들다는거야. 오늘부터 출입구 바깥으로 경비병들이 대기하고 있을거야, 나류. 나도 어쩔수 가 없어. 무건이 지시하는 거니까, 나도 어떻게 손써볼 도리가 없다 구. 기분은 나쁘겠지만 어차피 밖으로 안나가면 안보이니까, 그걸로 일단 참아, 그리고 나도 이곳에서 며칠간 지내게 될거야. 어지간히 급했는지 나더러 네 곁에 있으라더군. 침실 사용은 24시간 절대 엄 금이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내가 집지키는 개도 아니고, 네가 쬐 금만 덜 귀여웠어도 당장 그 버릇없는 자식 턱을 부셔놨을텐데 넌 내 취향이라 특별히 봐준거다. " 그러고 생각해보니 내가 열 두 살때, 일우에게 한번 도와달라고 부 탁했던 적이 있었다. 어떻게 알았던건지 이 녀석은 무건이 그 즈음에 나를 잠자리로 끌 어들이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면 틀림없이 나를 도 와줄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서, 일우에게 이곳을 나가고 싶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내 얘기를 듣고난 녀석의 대답은 간단했다. <미안하지만 무건에 관해서는 너를 도와줄수가 없어. > 내가 한 말을 무건에게 알리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더 이상 매달릴 수도 없을만큼 냉정하게 내 부탁을 끊어내고, 녀석은 가타부타 더 이상 토를 달지도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때만큼은 이 녀석도 무건과 비슷한 인간처럼 보여서, 엄청나게 실 망을 했었다. 어쩐지 그때일을 떠올리자 무겁게 한숨이 나왔다. "그런건 일부러 지금 찾아와서 말하지 않아도 상관 없잖아요. " "사실은 말이지, 침대에 곯아떨어져 누워있는 네 녀석 얼굴 보는게 묘하게 쓰릴있단 말야. 언제 등뒤로 귀신같은 놈이 나타나서 내 목 을 조를지 알 수 없고. 이상하게 무건은 내가 널 어떻게 할까봐 무 진장 경계하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잘도 나한테 집을 맏겨놓고 나흘 씩이나 출장이지. 사실은 집 어딘가에 뭔가 몰래 카메라라도 설치해 놓고 갔을지도 몰라. " 그러면서, 정말로 수상쩍다는듯이 방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 다. "그래서-- 난 지금 다시 들어가 봐야 돼. 아아, 빌어먹을. 수행원으 로라도 무건을 따라갈걸. 연방국의 관리하나가 끝내주는 미인이었는 데 말이야. 요즘은 누구 덕분에 하루종일 상사한테 감시당하느라 피 곤해. 졸리면 다시 누워서 자던가 무건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공부 를 하고 있던가 홀로그램이라도 켜두고 친구랑 놀고 있던가 하고 있으라구." 일우는 늑장부리며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제 일자리로 돌 아가려는 듯이 편하게 풀려있던 제복의 목주위를 바로 했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몰라. 나같은 인간은 사람들하고 섞여봤자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한 끔찍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가 확인만 하 게 될 뿐이야. 죽을때까지 갇힌채 친 형의 아이를 낳으면서 살아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을거야. " 오늘 불러낸 홀로그램은 나랑 똑같이 생긴 나류 3이었다. 홀로그램으로는 친구를 불러올수도 있었다. 대화도 나눌수 있게끔 프로그램 되어 있었지만 모두들 나랑 아주 비슷하게 생기거나 아니면 아직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으로 내가 원 하는 뭔가 고민거리를 얘기할 수 있는 어른 남자라던가 하는 사람 은 단 한명도 없었다. 하지만 나류 3은 진지하게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럼 너는 무건의 알을 낳을건가? " "농담마. 내가 알을 낳을수 있을리 없잖아. " "그러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뭘 고민하는거야. 굳이 집에서 달아 나려고 하는 이유가 뭐야? 너는 알을 낳을수 없어. 네가 고민하는일 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거야. 나류. " "그치만...... 나는 특별나게 강하지 않아, 죄의식도 느끼고 공포도 느 껴.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가끔씩은 정말 죽고싶을 정 도로 불안할때가 있다구. 이런것도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인간의 특 징인걸까? " 홀로그램 속의 <나류>가 쓸쓸한 얼굴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위로를 하려는것처럼 내 머리를 살그머니 두드려주었다. 주위는 푸른 잔디가 끝없이 펼쳐진 세상이다. 땅 끝에는 벨벳처럼 빛나는 푸른 밤 하늘이 맞닿아 있었다. 이곳에서 죽을때까지 수명을 채우고 살수있으면 얼마나 좋을지, 그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완벽한 유전인자를 타고난 인간은 단단한 체격에 적당히 큰 키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머리칼도 눈동자도 아주 짙은 검은색. 눈 코 입이 크고 얼굴 윤곽은 뚜렷하다. 그 정도만 되도 도시에서 확실하게 미래를 보장받는다. 반면 실패한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왜소하고 키가 작고 머리칼과 눈동자 색에 갈색의 부유물이 떠있다. 좋은 혈통을 잇고 있는 왕족들은 대부분이 우수한 유전자를 타고 태어나고 있었다. 다부진 몸과 큰 키는 좋은 머리와도 연관되는 것이다. 그런 집안에서, 나같은 정체불명의 유전자가 태어나고 말았다. 키는 작고 이목구비는 선이 희미해서 마치 연체동물의 모양을 연상 시킨다. 게다가 피부는 희고 팔다리는 가늘었다. 어머니는 이런 나라도 귀여워해 주셨지만 전대의 지도자였던 아버 지는 내 얼굴을 쳐다보기도 괴로워 했었다. 무건도, 나도 어머니가 수명이 다했을 즈음에 태어났다. 그것은 점차 여성의 존재가 도시안에서 사라지게 되면서, 정부에서 는 다음대 지도자가 될 태아를 알에서가 아니라 꼭 여성의 몸에서 얻고 싶어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건은 어머니 아버지가 수명이 거의 끝나가던 무렵에 간신 히 태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예기치 않게 뒤이어서 태어난,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 았던 실패한 유전자를 가진 아이. 처음에 아버지는 내 유전자 결과가 수치스러웠기 때문에 정부에다 가는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조차도 알리지 않았었다. 벌써 아기였을때부터 나는 키가 열등하고 피부도 얼굴도 모조리 부 족한 인간이라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나류라는 이름도 그때 열 네살이던 무건이 지어주었다. 그러니까 여성의 몸에서 나오는 지도자는 무건이 마지막이 되는 셈 이었다. "어젯밤은 즐거웠어? "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알수가 없어서 제복을 말끔하게 입고있는 일 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녀석은 씨익 웃으면서 윙크를 해보였 다. "무슨 말입니까? " "홀로그램 안의 아가씨와 밤새도록 즐거웠느냐는 소리야. 새벽 3시 까지 침실로 들어가는 기척이 없어서 슬쩍 들여다 봤었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어서 출근이나 하세요. 아가씨라니, 그런 사람이 있을리 없잖아요. 전부 나랑 똑같이 생긴 녀석들 뿐인걸. " "에? 최근에는 금발의 아가씨나 나이 많은 남자들이 인기 있다고 들었는데 왜 하필이면 똑같이 생긴 녀석들이야? 아주 기분나쁜 자 식이구만. " 취미가 확실히 이상한 남자를 욕해준 뒤에 일우는 버릇처럼 내 머 리칼을 쓱 흐트렸다. 그리고는 내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바로 하는 사이에 내 머리 정수리에다 얼굴을 묻고는 쪽하는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한다.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가정은 이런거란 말야. 뜨거운 밤을 보낸뒤 에 아침에 욕의만 걸친 애인이 나른한 눈길로 출입구까지 배웅해 주는일만큼 즐거운일이 있을까. 내가 섹스한 녀석들은 전부 일하러 가기 직전까지 침대에 달라붙어서 움직이려고 하질 않으니까 말이 지. 한심해. " 젠장, 이 사람은 갑자기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니까 항상 주의를 해 야한다. "참, 나류! 낮에 나 보고 싶어도 메시지 걸어오면 곤란해. 어렵게 두 집살림 하고 있는데 같은 일터에 새로 사귄 내 애인이 눈치채면 곤 란하니까. 질투가 상당하거든. 다녀올게. " 혼자서 실컷 좋을데로 떠들어 놓고는 노려보고 있을 틈도 없이 일 우는 잽싸게 출입구를 열고 나가버렸다.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다가 다시 한번 크게 한숨을 내쉰다. 새벽까지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봤지만 아직도 그럴듯한 방법은 생 각나지 않았다. 지금도 경비병들이 출입구를 지키고 있긴 하지만 평소에도 층층마 다 몇 명의 경비병들은 항상 대기해 있다. 창문 밑은 미끌거리는 가파른 벽에다 실내에서 실외로 통하는건 중 앙 출입구와 창문밖에 없었다. 창문을 통하더라도 6층 높이를 그냥 뛰어내리는 방법뿐이고 그렇게 되면 어딘가 틀림없이 몸에 고장이 날텐데 그런 몸으로는 멀리 달 아날수도 없다. 아니 달아나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맨션을 지키는 관리자들의 눈에 띄게 될거다. 아프다는 구실로 달아날 틈을 만들어 보려고 식사를 가지고 들어온 경비관들이 보는 앞에서 난리를 쳐봤다가 의료센타의 의사들이 직 접 집으로 찾아와서, 사람들이 많은데서 발가벗기운채 진료를 당했 던 적도 있었고 외출했다가 그대로 도망쳤던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뒤로는 바깥 출입조차도 마음대로 할수없게 되었던 것이 다. 게다가 무건도 그 뒤로는 조금도 의심을 풀지 않는다. 외출하고 싶다고 메시지를 넣으면 반드시 몇 명의 수행원들을 딸려 보내고 내가 어느곳을 다니고 있는지 모조리 다 보고 받고 있었다. 무심결에 소리를 지른건 매일 아침의 습관으로 욕실의 거울에 달라 붙어서 물끄러미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을 때였다. 그러니까- 동공의 색깔이 바뀌고 있었다! 기묘한 푸른빛깔이 나타났다 사라지는걸 몇초에 한번씩 반복하고 있었다. 무건이 출장을 떠난지 사흘째, 일우는 아침일찍 나가버려서 오늘 아 침은 미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째서 이틀전이 아니고 오늘일까, 컴퓨터로 찾은 지식으로는 동공이 바뀌는 시기는 난막이 만들어지 는것과 거의 동시에,라고 했다. 난막은 수정후 12시간안에 생성된다. 길어봤자 12시간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흘째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봤자 어쨌든 무건의 아이다. 결국 이런 날이 오고 말았다. 두려워 하면서 떨던 일이 현실로 이루 어져 버렸다. 임신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알을 낳다니 말도 안된다. 나는 남자다! 작은 키에 열등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는 해도, 막연히 무건의 아 이만 아니라면 누구의 아이든 낳을수 있다고 생각은 했어도 막상 현실로 닥친- <가정>이 아니라 정말로 뱃속에 알을 키우게 된 지 경에 이르자 미칠 정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뭔가 생각을 해야 한다고 머릿속에서 말해주고 있었지만 어지러운 머릿속으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조만간 이런 날이 오게 될줄 알았으면서, 전부 안이하게 버티고 있 었던 결과다. 내일밤이면 무건이 도착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게 다 끝장이다. 무건은 분명히 내 눈동자 색이 이상하다는걸 눈치챌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그대로 꼼짝없이 알을 낳아야 한다. 되물릴수도 없을 것이다. 얌전히 아이만 낳아주고 모든게 끝난다면 다행일테지만 그게 아니 라는건 얼마전에 확인했다. 알을 낳으면 자유롭게 해줄거냐는 물음에 무건은 불같이 화를 냈었 다. 어차피 원하는건 그것 하나일텐데, 정말 바보같은 남자다. 뭐가 뭔지 뒤죽박죽으로 섞인 머릿속으로 문득 알을 죽여 없애면 된다는 생각을 해낸건 다음날 새벽이었다. 그날밤은 일우가 돌아오기 전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도 일부러 자는체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내 괴로움의 근원은 뱃속에 들어있다. 이것뿐이다. 어차피 어제까지만해도 없다가 하루 아침에 생겨난 이상한 생명같 은 건 내 손으로 죽여 없애면 되는 것이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어딘지 묘한 공간에 누워있었다. 온 몸이 제멋대로 떨리는데다 감각이 둔해져서 멍하니 뜬 눈으로 아직도 나른한 꿈 속을 헤매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내 옆으로 흰 제복 차림의 무건이 나를 내 려다 보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눈이 마주치자, 순간 흠칫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얼음처럼 차갑고 감정이 없는 눈이다. 평소에도 표정이 없었지만 지금은 마치 살아서 온기가 붙어있는 것 같지도 않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꿈이 아니었던걸까?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있는 모든 일들을 떠올려봤다. 결국 해결책을 생각해낸 나는 다음날 오전에 업무중인 일우에게 메 시지를 요청해서, 무건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짧은 시간에 머리를 짜내서 미리 준비한 말로 일우를 위 협했다. 그러니까, 수정후 12시간이면 생성되는 난막이 이틀이나 늦어져 버 렸으니 틀림없이 무건이 돌아오면 당신을 의심하게 될거다. 내가 그렇게 그에게 말할 거다. 2년동안 생기지않던 알이 하필이면 당신이 있던 날에 생겼으니까, 반드시 무건은 내 말을 믿어줄거다- 그게 싫으면 약을 달라고 그렇게 협박했다. 부탁따위, 이미 오래전 본인에게 깨끗하게 거절당한 경험이 있는 것 이다. 남은 것은 위협밖에는 없었다. 내 말을 잠자코 듣고있던 일우는 잠시 고민하던 끝에 <그렇게 무건 이 싫은거냐?>하고 진지한 얼굴로 물어왔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그럼 약을 주겠 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10분뒤에 약속한 약을 가지고 집으로 찾아왔던 것 이다. 녀석은 알을 죽이는 약을 가지고 온 주제에 내 얼굴을 보면서 어딘 지 기묘한 얼굴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기분나쁜 농담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우가 돌아가자 마자 나는 욕실 에서 정맥을 찾아 팔에다 꽂고 약을 주사했다. 그런데, 그 뒤로는 기억이 완전히 끊어져버린 것이다. "아쉽게도 아이는 아직 죽지 않았어. " 섬뜩하리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무건이 머리맡에서 속삭이듯 말하 고 있었다. 역시.... 그 자식이 거짓말을 했던거군.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했더라도 일우가 나를 도와줄리 없다는건 알수 있었을텐데 앞뒤 생각없이 너무 경솔하게 행동해 버렸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자식한테 알을 가졌다고 털어놓다니! 협박이라면 통할지도 모른다고, 일우는 어쨌든 무건을 두려워하니 까, 나한테 약을 가져다 줄거라고 믿었다. 이미 생긴 뱃속의 아이를 없애는 약은 쉽게 구할수 있는게 아니니 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녀석 밖에는 부탁할만한 곳이 없었던 것 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 녀석이야말로 가장 믿을 수 없는 놈이었는데, 늘 웃고있는 얼굴로 내 행동을 하나하나 무건에게 알리니까. 느닷없이 일어난 일에 허둥대다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질 러버렸다. "너는 상당히 잔인하군. " 푸른 등이 깔린 어두운 방 안에서 무건의 음낮이가 이상한 음산한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은체 하려고 해봐도 몸이 스윽 차가워질만치 오싹하게 들렸다. 이 사람은 아무런 죄의식도 없는 얼굴로 내게 잔인하다고 말한다. '내가 잔인하다고? 잔인하다면 나를 그렇게 만든건 당신이다, 하고 마음속으로 되받아치고, 얼굴을 마주보는게 꺼림직해서 고개를 돌리자 금방, 커다란 손으로 단단히 턱이 잡아 당겨졌다. 조형미라곤 아무것도 느낄수없는 둥근 방 안은 분명히 병실이었다. 창도 없고 주위는 온통 벽으로 감싸여져 있다. 한달에 한번씩 종합검진 식으로 들리곤 하니까 병실의 생김새는 이 미 알고 있다. 무건은 마치 커다란 고양이처럼 소리없이 침대 위로 상체를 드리우 더니 죽은 시체같은 표정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아이는 죽지 않았다. 그럼 아직도 뱃속에 살아 있다는 걸까? "잠깐 외출한틈에 일을 벌려놓다니. 그렇게 원하면 내가 너부터 죽 여줄까? " 부드러운 음성은 내게 마치 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죽여줄수 있다. 죽여주겠다. 그것이 가능할까? 인간의 몸은- 병에 걸리지 않는 한 수명을 다하 고 죽는다. 200년에 가까운 영겁의 시간을, 죽여줄수 있다고? 그래, 이 사람은 지도자니까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끄러미 내 얼굴을 노려보던 무건은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떨면서 이상한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네가 도망갈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어, 나류. " 언제나 무감각하게 보이던 얼굴이 분노로 가득 차서, 조금의 숨김도 없이 그대로 적의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처음으로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나쁜 병원균을 몸속에 주사해서 감염시키면 그대로 목숨은 끝난다. 그런 병원균이 도시내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의료센타안이라면 보관 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이대로 몇 대라도 얻어 맞을지도 모른다. 한번도 무건에게 맞아본적은 없지만 -심지어 예전에 달아나려다가 잡혔을 때 조차도 -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렇게 화내고 있는 얼굴은 처음인 것이다. "넌 내가 죽어 없어질때까지 내 옆에 데리고 있어주지. 감히 너한테 죽을 자격같은게 있을까! 알을 낳아, 나류! 낳아서 길러! 네가 죽이 려고 했던 아이를 보면서 평생을 한번 살아봐, 그게 네가 할 일이 다! " 아플만큼 강하게 어깨를 움켜잡힌채 누운 자리에서 억지로 끌어올 려진다. "나는 지도자의 아이같은건 낳고싶지 않아요. " 순간, 스스로도 놀랄만큼 강한 어조가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 나왔다. 내 말에 얼굴빛이 변하는 무건이 보이는데도 한번 입밖으로 마음속 에 담고있던 말이 튀어나가게 되자, 더 이상 참을수가 없어졌다. "뭐라고? " "당신의 아이같은건 낳고 싶지 않아! 절대로 싫어! " 누가 뭐라고 해도 싫다. "나는 배양센타의 남자들하고 똑같아! 틀린건 그나마 순수하게 왕족 의 피를 받았다는거지. 당신은 다음대 지도자를 불확실한 남자의 몸 에서 낳게하고 싶지 않는 것 뿐이잖아!! 동생인 나한테서 알을 낳게 하면 어차피 왕족의 피니까, 불완전한걸 줄일수가 있는거야. 그래서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는거 아니냐구? " 사실은 그런 것이다. 남자의 몸에서 태어나는 태아는 어딘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꺼림직 함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는 해도 어차피 돌연변이의 한 형태일 뿐이다. 인류가 살아남기위해 진화한 결과물이다. 그런 존재를 다음대의 왕으로 하기에는 아무래도 걸리는 것이 있다. 전대 왕이었던 아버지도 끝까지 다음대의 지도자는 올바르게 여성 의 몸에서 난 태아 이기를 바랬다. 정부에서도 그렇게 원했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무건이다. 전대를 이어 왕이 된 무건도 틀림없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다. 그러니까 어짜피 불안전한 알의 형태로 다음대의 왕을 만들어야 할 바에는 출생이라도 올바른-- 이런 꼴은 하고 있지만 어쨌든 같은 왕족의 몸에서 낳게 하자는, 그런 의도가 아닌가? 그래서 내가 골라진 것이다. 내 어깨를 붙잡고 있던 무건의 손이 문득 툭 떨어졌다. 눈물이 날것같아서 잔뜩 노려보고 있자, 무건은 어딘지 어이없어하 는 얼굴로 물끄러미 내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표정은 괴상했다. 그럴리 없는데 하얀 얼굴은 어딘지 초조해 하는것처럼 보이기도, 곤 란해하는 것 처럼도 보였다. "그럼.... 너는 내가 다음대의 지도자를 왕족의 피로 만들기 위해서 너한테서 아이를 가지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냐? " "생각한게 아니라 그런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를 놔달라 구요. 당신이랑 정부에 더 이상 이용당하기는 싫으니까. " 정말 괴로운건 그런 것이다. 무건이 나를, 왕족의 피를 이은 아이를 낳을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 는게 싫었던지도 모른다. 근친교배로 생겨난 아이보다 그쪽의 괴로움이 더 컸을지 모른다.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실컷 좋을대로 이용당한뒤에 버려지는건 딱 질색이다. 현실에 순응하게 되면서 얻게되는 달콤한 안락따위, 전부다 거짓이 다. 마음을 내주면 그만큼 상처받게 된다. 더구나 내 몸을 알을 낳는 도구로 이용하고 싶어하는 남자같은건 평생을 부족한 산소와 더러운 세균들 사이에서 살아가게되더라도 반드시 피해주고 말겠다. "<알>이 아니면 뭐지? " 어쩐지 망연자실한 얼굴로 내 앞에 서있던 남자가 불쑥 물어왔다. 평소에는 언제나 사나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노려보는 주제에 지금 은 뭐가 뭔지 혼란스러워하는것처럼 보였다. 나직한 저음이 어쩐지 부드럽게 들려서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에 무 건이 다시 말했다. "어떻게 해야 너를 붙잡아 놓을수 있지? " 어차피 버려질바에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너는 내가 지도자가 아니었다면 내 아이를 낳아줬을건가? " 불완전한 유전자, 알을 가진 돌연변이, 누가 이런 존재를 진심으로 대해줄까, "알같은건 아무래도 좋다. 그렇게 싫은거면 없애도 돼." 순간 불쑥 내밀어진, 믿을수 없는 말에 틀림없이 나를 비웃고 있다 고 생각했지만 무건은 뭔가 가만히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 다. "달아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알을 낳게 하려고 생각 했 던거다. 넌 틈만 나면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썼으니까, 내가 너를 이 용하고 있다고 믿었을 정도로 너는 내가 싫었던건가? " "나를 붙잡아둘 이유가 없잖아요. " "이유? 정말 이유를 모르는건가? 넌 바보로군. " 어이없다는 투로 말하는 얼굴은 어딘지 조금 안타까워 보였다. "나류, 네가 필요하다. 이용하고 있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는 그만 둬. 그런짓을 할 정도로 머리가 썩진 않았으니까. 나는 '알'같은 것 이 필요한게 아니라 네가 필요한거다. 아직도 이해가 안되는건가? " "그치만..... " "하지만 너는 못믿어. 알은 지워도 좋다. 대신 너한테 절대 자유는 줄수 없어. 날 안심시켜논 뒤에 틀림없이 이번에는 돔 바깥으로 달 아나 버릴테니까. " 알은 지워도 좋다, 대신 자유는 줄수 없다, 무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 소리내어서 입밖으로 말하는 순간 눈앞에 있던 커다란 품에 끌어안 기다시피 붙잡혔다. "너는 언제까지 나를 애먹일 참이지? 안절부절하는 내 꼴을 보는 것이 즐거운가? 그럼 실컷 보라구. 너 때문에 중요한 회의도 집어치 우고 1000마일을 단숨에 날아왔으니까. 이제 지도자 자질을 두고 퇴 위된다고 해도 아무런 할말이 없을 정도야. " 표정처럼 언제나 서늘하다고 생각했는데 끌어안긴 몸은 의외로 뜨 겁고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어서 조금 놀랐다. 그러니까, 조금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고 있는걸까? 알같은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해주었다. 실제로 자신의 알을 죽이려고 약까지 주사했었다. 그런데도 그런건 상관없다고 말해준다. 뱃속에 들어있는 자신의 알을 없애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사실일까? 믿어도 될까? 내가 알을 낳아줘도 나를 버리거나 하지 않을건가? 가슴속에 불안하게 맺혀있던 덩어리가 천천히 저 밑까지 가라앉아 간다. 친동생이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좋다고 말하고 있는걸까, 불완전한 유전자를 가진 나라도 좋다고 해주는건가? 나도 조금쯤은 손을 내밀고 의지해도 좋다는 걸까? 그렇다면 어쩌면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 친형의 알을 낳아 키우면서 살아가는것도, 어차피 진화한 돌연변이인 인간들이 살고있는 도시다. 나같은, 혹은 무건같은 인간이 조용히 숨쉬면서 살아가도 어쩌면 신 은 모른체 해주실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이 깨지고 사라진 도시에 가장 절 실한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끝.